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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 적장자 출신의 왕으로 세번이나 결혼했던 문종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후 정종, 태종, 세종에 이르기까지 적정자인 왕은 없었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사이의 8 2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나 조선 최초의 적장자 왕이 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문종입니다.

 

문종

 

문종이라는 묘호로 인해 병약한 군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양대군 (세조)

 

문종은 문무를 겸비했던 인물이었고, 그 기상도 남달라 훗날 세조가 되는 야심가 수양대군 조차도 문종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모든것이 완벽한 왕이었던 문종. 그러나 그런 문종도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는데요.

 

문종은 결혼을 세번이나 했는데요.

 

첫번째, 두번째 결혼은 실패했고, 세번째 결혼은 사별을 합니다.

 

세종 3(1421), 문종의 나이 7세때 왕세자로 책봉이 되었고, 이후 세자빈을 들였는데요.

 

휘빈 김씨

 

첫 번째 세자빈은 휘빈 김씨였습니다.

 

문종의 아버지 세종은 성품이 뛰어난 김오문의 여식을 골라 아들 문종의 세자빈으로 삼았습니다.

 

세자는 첫날밤 이후 휘빈 김씨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요.

 

그로인해 야사에서는 휘빈 김씨가 너무 박색하다는 이야기가 떠돌 정도였습니다.

 

문종에게 관심받지 못하여 좌절한 휘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이상한 술법을 쓰게 됩니다.

 

사랑받는 궁녀의 신발 앞코를 잘라 태워서 재로 만든 다음 문종한테 먹이면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다,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게 된다 와 같은 술법을 시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미수에 그쳤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세종은 크게 노하며 휘빈 김씨를 폐출시키고, 새로운 세자빈을 간택합니다.

 

순빈 봉씨

 

두번째 세자빈은 순빈 봉씨였습니다.

 

휘빈 김씨의 외모가 문제가 되어 그 사례를 거울 삼아 이번에는 외모도 선발 기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찾이했습니다.

 

순빈 봉씨는 적극적이고 거침이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평소 자주 술에 취해 업혀 다녔고, 궁녀를 때리기도 했으며, 문종의 사랑을 받기 위해 노래를 지어 궁녀들에게 떼창을 시키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시아버지 세종이 이런 봉씨에게 열녀전을 내리며 공부하게하자 며느리 봉씨는 이를 거부하는데요.

 

 

이런 봉씨를 보고 문종은 "자신이 순빈 봉씨를 총애하면 한나라의 여후보다 못하지 않을 것" 이라 말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여후는 한 고조 유방의 아내인 여태후를 말하며 중국 3대 악녀중 한명으로 꼽히는 성정이 잔혹한 여인입니다.

 

무서운 시아버지에 감시하는 시어머니, 거기에 더해 무심한 남편까지...

 

지친 순빈 봉씨는 기댈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집에서 대리고 온 본방나인을 총애하다 동성애를 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결국 폐출당합니다.

 

차기 왕이 될 왕세자가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3번째 세자빈을 간택하지 말고 기존의 후궁 중 1명을 뽑아 올리기로 합니다.

 

양원 권씨

 

그리하여 경혜공주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를 새로운 세자빈으로 뽑았습니다.

 

양원 권씨는 앞의 두 세자빈과는 달리 문종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이렇게 문종의 세자빈 문제는 해결이 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원 권씨가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로인해 또 다시 문종의 세자빈 자리는 공석이 됩니다.

 

 

그러나 새 세자빈을 뽑는 문제는 흐지부지되었고, 문종이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결혼을 하지 않아 조선의 왕 중 재위기간 동안 유일하게 왕비를 두지 않았던 왕이 됩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는 씨앗이 되었는데요.

 

 

소헌왕후와 세종의 3년상을 연달아 치르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문종이 2년만에 어린 아들 단종을 남겨두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합니다.

 

왕비를 두지 않았던 문종이 사망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어린 단종을 보호하며 수렴청정을 할 왕실의 웃어른이 없었습니다.

 

이는 왕권의 약화를 불러왔고, 훗날 계유정난을 거쳐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로 등극하는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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