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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식렴

 

고려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던 왕식렴

 

고려 왕조의 왕족이자 태조 왕건의 사촌동생이었던 왕식렴.

 

그는 고려의 왕을 바꾸고 그 왕 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왕식렴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워 건국공신에 보훈되었고, 왕건이 북진을 하여 고구려의 옛 수도인 서경(평양) 까지 되찾은 이후 그 곳을 왕식렴에게 맡겼습니다.

 

당시 서경은 허허벌판이었는데요.

 

 

왕식렴은 서경의 총관이 되어 서경을 개경 다음 가는 대도시로 만듭니다.

 

서경을 맡게 된 이후 청천강 쪽으로 영토를 넓혀 안수진, 흥덕진을 쌓는 등 고려의 북진에 공을 세웠으며, 서경의 군사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려 여타 호족들보다 더 강대한 군사력으로 고려최강의 호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를 지지해준 왕건 조차 왕식렴의 군사력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삼국이 통일되고 고려황실은 후계문제로 인해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왕건은 29명의 부인이 있었고, 그 부인들에게서 34명의 자식을 얻었습니다.

 

 

2비였던 장화왕후 오씨가 낳은 왕무가 다음 왕이 되니 이가 곧 혜종입니다.

 

그러나 왕무는 지지 세력이 약해 그 자리를 노리는 왕건의 다른 아들들이 호시탐탐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왕요와 왕소 형제는 외가인 충주 세력이 강력한 호족 세력에 속했고 숙부인 왕식렴의 후원까지 얻고 있었기 때문에 혜종은 동생들이 자신을 죽이는 것은 아닌지 늘 전전긍긍했습니다.

 

이후 왕식렴은 서경의 군사들을 이끌고 개경으로 진격해 혜종의 지지세력인 왕규와 박술희를 제거하고 혜종 왕무를 압박합니다.

 

이후 병을 얻은 왕무가 세상을 뜨자 왕요가 왕에 오르니 이가 정종입니다.

 

정종이 왕이 된 후 왕식렴은 왕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합니다.

 

 

정종의 등극에 기여한 왕식렴의 입김 때문인지 정종은 서경 천도를 천명하며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그러나 무리한 서경 천도 공사에 일반 백성은 물론 개경 호족들까지 거세게 반발하는 데다 왕자 소마저도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등 정종의 치세가 혼란해진 가운데, 949년 왕식렴은 사망합니다.

 

왕식렴이 죽고 두달 뒤 정종도 사망하였고, 그의 동생 왕소가 즉위하니 이가 광종이었습니다.

 

광종은 서경천도를 백지화하고, 왕식렴의 아들들과 측근들을 제거하게 되면서 개경 다음으로 대도시였던 서경은 그저 그런 도시로 전락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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