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실존했던 흡혈귀 장군 소기파 장군
전장에서는 왜구의 쓸개를 꺼내 씹을 만큼 잔인한 장군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자애로웠던 장군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소야차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소기파 장군입니다.
소기파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지주이며 한성부 판윤을 지낸 소효식의 차남으로, 성종 때부터 중종 때 까지 활약한 인물입니다.
1494년(성종 25년)에 북방 변경정벌에 종군하였으며 1500년인 연산군 6년에는 강계 이평에 침입한 여진족을 몰아내는 등
북방 변경에서 여진정벌 작전에 주로 참전하였고, 여러 공을 세웁니다.
1508년 중종 2년에는 부령 부사에 올랐습니다.
그는 재물이나 승진에 큰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하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던 장수였습니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자애로운 정치를 베풀었고, 그로인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1509년 중종으로 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포상을 받게 되는데, 이를 전하러 오는 이장곤이라는 부령이 오자, 백성들은 소기파에서 다른 부사로 교체가 되거나, 새 부사가 부임한 줄 알고 이장곤에게 달려가 부사님을 더 계시게 해 달라며 간절히 부탁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종 실록에 소기파의 자급(벼슬아치의 위계) 을 한 등급 올려주었다는 기록에 보면 "기파는 무인으로서 성격이 청렴결백하여 가산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적을 만나면 자기를 잊으며 강하고 용맹스럽기 비할 데가 없는 사람이다. 북방에 있을 적에는 사람들이 일컫기를 ‘철내금(鐵內禁)’이라고 하였다" 라 적혀 있습니다.
1510년 소기파는 웅천 현감으로 부임하는데 이곳에서도 부령 부사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그로인해 명망이 높았습니다.
1510년 부산포, 내이포, 염포 등 삼포에서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삼포왜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소기파는 이 당시 50대 초반의 나이로 당시로는 고령의 나이였지만, 뛰어난 활 솜씨와 무예 실력을 바탕으로 큰 조카 소세온, 셋째 조카 소세공과 함께 전투에 참전해 왜적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웁니다.
백성들에게는 자애로운 소기파였지만, 적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인물로 돌변합니다.
중종실록 11권, 중종 5년(1510년) 4월 22일 에 기록된 소기파의 행적을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요.
"왜적들의 시체를 뒤적여서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자가 있으면 가슴을 찔러 숨통을 끊고 그 피를 자신의 얼굴에 바르고 나서 배를 갈라 쓸개를 꺼내어 술안주로 삼았는데, 이로 인해 세간으로부터 소야차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행위는 당대 조선인들도 끔찍하다 여겼다고 합니다.
소기파의 무예실력을 바탕으로 왜적을 삼포의 왜적을 소탕하는데 큰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뽑히지만, 그의 잔인함으로 인해 관료들이 그를 1등 공신에서 빼자고 건의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중종은 웅천 현감으로 백성들에게 명망이 높았던 소기파를 그대로 공신에 봉하여 일등 공신으로 녹훈이 됩니다.
이후 소기파는 1522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고, 70세 정도까지 살다 생을 마감합니다.
지방 수령으로서 백성을 다스릴 때는 고충을 들어주는 자애로운 사람이었지만, 적을 마주하면 잔인할 정도로 도륙하고 심지어 식인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 세간의 두려움을 샀던 소기파 장군.
이 이야기가 야사가 아닌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더 놀라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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