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최악의 폐륜왕 충혜왕
고려, 아니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방탕하고 음란했던, 최악의 왕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고려 제 28대 왕인 충혜왕입니다.
충혜왕의 이름은 왕정이며, 몽골식 이름은 왕부다시리 입니다.
27대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고려말 개혁군주로 유명한 31대 공민왕의 친형이었습니다.
충혜왕이라는 시호는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이며, '충'은 원 간섭기에 재위했던 왕들에게 신하로서 원나라에 충성해라는 의도로 붙인 글자입니다.
1328년 2월 세자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서 숙위(황제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속국의 왕족들이 볼모로 가서 머무는 일)하였습니다.
당시 고려의 왕위 계승은 아버지가 고려의 왕이라는 혈통의 문제보다는, 원나라에 얼마나 강력한 지지 기반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충혜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 승상 엘테무르와 가까웠으며, 그는 세조 쿠빌라이의 고손녀인 이렌첸반(덕령공주)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총명하기는 했지만, 어려서부터 술 마시고 방탕하게 노는 것에 익숙했었는데요.
세자 시절 절 지붕 위의 새를 잡는답시고 절에 방화를 한 뒤 도망가거나, 불량배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여자를 겁탈하거나 술을 즐기는 만행을 저질렀는데요. 오죽했으며 아들의 만행을 듣게 된 부왕인 충숙왕도 경악하고 욕까지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25대 충렬왕과 26대 충선왕이 원나라에 의해 왕위를 수시로 빼앗겼던 것처럼, 그의 아버지 충숙왕도 1330년 원나라에 의해 사실상 왕위를 빼앗겼고 겉으로는 충숙왕의 양위를 받은 것처럼 하여 1330년 2월 왕정이 고려로 귀국해 왕위를 계승하고 충혜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도 정치보다는 술과 여자를 탐했으며, 사냥을 즐겨 백성들까지 힘들게 했습니다.
정치는 뒷전이고, 주색에만 빠져있던 충혜왕은 결국 폐위가 되고 마는데요.
왕위에 오른지 2년만에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로 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를 지지해준 엘테무르가 사망하고, 원나라의 실세가 된 태보( 정1품 고위직) 바이안이 ‘충혜왕이 본래 행실이 나빠 원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일에 누가 될까 염려스러우니 그의 아버지에게 배우게 하십시오’라며 충혜왕의 폐위를 주청 했고,이것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 충숙왕이 다시 고려의 왕이 되었고, 충혜왕은 원나라에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원나라 황족, 귀족들과 함께 유흥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했고, 엘테무르의 아들 등과 함께 여자를 희롱하고, 술에 취해 다니기 일수였으며, 숙위에도 간혹 결근을 하기까지 합니다.
이에 분노한 바이안은 건달, 양아치를 뜻하는 '발피'라 비난하기까지 했습니다.
1339년 3월 아버지 충숙왕이 사망하고 고려 왕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다시 고려로 돌아와 왕위에 복위합니다.
다시 왕이 된 충혜왕은 역시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여색에 미쳐 지냈으며,내시들과 씨름이나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유흥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상업의 발전을 꾀하기까지 했는데요.
재정 확보를 위해 상인들을 시켜 금, 은, 포목 등을 원나라에 가서 판매하여 이득을 얻도록 했으며, 큰 이득을 얻어온 상인들에게는 장군의 벼슬을 주기도 했습니다.
상인들을 가까이하고 우대한 충혜왕은 사기그릇을 파는 상인인 임신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사치와 향락을 즐기고, 원나라 세도가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뇌물로 사용합니다.
자신의 사리사욕과 쾌락을 추구했던 충혜왕은 희대의 폐륜왕이기도 했습니다.
여자는 신하의 아내든, 친인척의 아내든 상관없이 마음대로 마구 겁탈을 했습니다.
장인의 후처도 겁탈했으며, 외삼촌 홍융의 아내도 겁탈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아버지였던 충숙왕의 후처였던 수비 권씨와 정비의 위치에 있던 경화공주까지 겁탈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경화공주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증손녀로 원 황실에서 높은 신분을 갖고 있었는데요.
겁탈을 당한 그녀는 수치심을 느끼고 이 사실을 원나라에 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놀란 충혜왕은 그녀가 원나라에 이 소식을 전하지 못하도록 그녀와 주변을 단속했습니다.
이에 경화공주는 재상인 조적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심왕 고를 고려의 새 국왕으로 옹립하고 싶었던 조적은 이 사건을 빌미로 군사 천명을 대동해 왕궁을 습격하는 반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때 충혜왕이 직접 말을 타고 화살을 쏘며 군대를 이끌고 조적의 반란군 무리를 평정해버립니다.
그러나 결국 이 사실은 원나라에 알려지고 마는데요.
원나라에서 국새를 가지고 고려로 온 두린이라는 사신이 경화공주를 먼저 알현했고, 황제가 하사한 술을 경화공주에게 바쳤는데, 공주는 술을 마시지 않고, 수치심에 울기만 했습니다.
이에 다른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경화공주는 사신 두린에게 자신이 겁탈 당한 일을 말하게 되었고, 두린 사신 일행은 충혜왕을 원나라로 압송해갑니다.
충혜왕은 원나라 형부에 투옥이 되었습니다.
고려 왕위를 빼앗길 처지에 놓였던 충혜왕은 그를 미워하던 바이안이 실각하고, 원나라의 정계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원 황제의 명을 받아, 원나라로 압송되고 6개월 만인 1340년 5월 고려 왕위에 다시 복위하게 됩니다.
이 정도 했으면 정신 차릴 법도 하건만. 충혜왕은 왕으로 복위해서도 여전히 여성들을 겁탈했으며 신하들을 때려죽였습니다.
거기에 더해 농번기에 백성들을 동원해 부역을 시키는 등 흉악무도함이 끝을 몰랐습니다.
오죽했으면 한국사 간신배로 유명한 기황후의 오빠이자 부원배인 기철이 충혜왕의 만행을 원나라 황제에게 알리고, 그를 처리해줄 것을 원나라 황제에게 청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원 황제는 충혜왕을 원나라로 호출했지만, 눈치빠른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계속 출두를 거부합니다.
이에 1343년 11월 화가 난 원나라 사신들이 충혜왕을 속여 정동행성으로 그를 유인해내었고, 구타하여 포박한 후 원나라로 끌고 갑니다.
이때 충혜왕을 시종 드는 사람이 없었고, 그를 증오했던 원 사신들도 시종을 줄 생각조차 없어서 충혜왕은 짐을 직접 들고 압송되어 원나라로 갔습니다.
끌려온 충혜왕을 본 원나라 혜종은 "그대의 죄는 너무 커서 죽어 마땅하지만, 짐은 살생을 좋아하지 않으니 귀양을 보낸다." 고 명합니다.
그리고 게양현(현재의 광둥성 지역)으로 귀양 가는 도중 악양현(호남성 지역)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귀양길을 따른 신하는 하나도 없었을뿐더러,그의 죽음에도 고려 백성들 가운데 아무도 슬퍼하는 자가 없었다고 하니 그의 폭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고려사절요》 권25 충혜왕 갑신 5년(1344년) 에는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고려 백성들이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왕은 수레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온갖 고초를 겪다가 게양에 못 이르러 악양현에서 훙서하였다(죽었다). 어떤 사람은 짐독에 독살되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 낮은 백성들 가운데는 되살아나는 날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충혜왕 그는 영리한 머리와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쁜 곳에만 사용했고, 악인과 소인배들을 가까이하며, 황음 무도했다.
결국 안으로는 부왕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로부터 벌을 받아 죄수의 몸으로 유배 가는 도중 객사한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라고 고려사도 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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