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포진성에서 왜군과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윤흥신
조선 전기 최고의 외척 가문이었던 파평 윤씨 윤임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집안이 몰락해 노비가 되었던 인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32년만에 다시 신원이 회복되어 다대포 수군첨절제사가로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맞아 다대포진에서 끝까지 싸우다 전사합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이 인물은 바로 윤흥신 입니다.
윤흥신은 앞서도 언급을 했지만 중종 때 권신인 윤임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아버지 윤임이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오빠이니 윤흥신은 왕비의 조카였습니다.
중종 말년이 되자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를 지키려는 윤임의 대윤과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을 보호하려는 윤원형의 소윤이 첨예하게 대립을 하며 긴장감을 높이는데요.
이후 인종이 즉위하고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소윤은 대윤을 역모 혐의로 엮어 대거 숙청을 합니다.
이 사건이 바로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입니다.
아버지 윤임이 을사사화로 숙청될 당시에는 5세로 나이가 어려 죽음을 피한 대신 공신의 노비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때 첩실 소생의 두 아들인 윤흥효와 윤흥제도 살아남는데, 윤흥제는 이후 다대포 전투에서 형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을사사화 때 피해자들의 명예가 1577년 선조 10년에 회복이 되니 3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이때 윤흥신도 양반 신분을 되찾고 몰수된 재산도 돌려받았습니다.
그리고 무과에 응시해 장수가 됩니다.
하지만 거의 마흔이 다되도록 노비의 삶을 살다 보니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였습니다.
1580년(선조 13) 선조실록에는 ‘진천 현감 윤흥신이 문자를 해득하지 못해 파직됐다’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입니다.
윤흥신이 글자를 전혀 몰랐다는 것은 아니며 조정의 문신들이 요구하는 지방관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무관으로는 상당한 실력을 발휘한 그였습니다
이후 1592년 다대진 첨절제사로 임명됩니다.
그가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부산진 전투 직후 왜군 일부는 동래성으로 향하고, 일부는 다대포와 서평포, 서생포로 흩어져 공격해왔습니다.
이때 윤흥신은 800여명의 병사로 다대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4월 13일 다대포로 진격해온 왜군과의 첫 교전에서 윤흥신은 동생 윤흥제와 함께 군,관,민을 독려하며 전투에 임했고 적을 격퇴합니다.
그러나 첫 전투에서 대부분의 물자를 소비한 조선군이었는데요.
이튿날인 4월 14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휘하 병력이 불과 800명밖에 없던 윤흥신은 19,000명에 육박하는 왜군을 상대로 종일토록 활을 쏘며 분전하다 결국 전사합니다.
첫날 적을 물리치고 난 후 그의 부하들이 “명일에 적이 큰 세력으로 와서 공격한다면 상황이 반드시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을 나가 피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라고 하자, 윤흥신 장군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차마 간다는 것이냐”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604년(선조 37년) 6월 25일 선무원종공신 1등에 추록되었으며, 1736년(영조 12)에 동래 충렬사에 제향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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