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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암

 

임진왜란 연안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 이정암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연안성에서 왜장 구로다의 5천 병력을 1400명의 의병으로 막아낸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정암 입니다.

 

어렵게 적을 물리치고도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지 않고 한 줄짜리 장계를 올렸던 인물.

 

이정암

 

이번에는 연안성 전투의 영웅 이정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정암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황해도 의병을 모아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는 1558년 진사가 되었으며, 156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합니다.

 

이후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었으며, 외직으로는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경상도 까지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정암은 백성들을 잘 보살폈으며, 각종 폐단을 근절하여 민심도 얻었던 인물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이조참의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전란이 터진 후 평안도로 선조가 몽진을 온다는 것을 알고 호종하려 했으나 늦어서 미치지 못했고, 전란을 막지 못하여 명목상 직위 해제되어 소임이 없었습니다.

 

맡은 바 임무가 없어지자 당시 개성 유수로 있던 동생 이정형에게 가서 함께 개성을 수비합니다.

 

그러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개성 역시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는데요.

 

이에 동생과 함께 개성을 탈출해 후일을 도모하기로 합니다.

 

 

한편 왜군은 일단 개성을 점령하고 난 뒤에는 곧바로 평양을 치기 위해 대동강 전선으로 전진했기에 황해도 대부분 지역이 왜군의 진격로에서 살짝 벗어나 적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일단은 피하게 되는데요.

 

이때 남부지역에서는 곽재우를 비롯해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왜군과 유격전을 벌였고,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에 왜의 수군이 격파당하면서 수륙병진 정책이 물거품 된 왜군.

 

그렇다 보니 그들의 예봉은 평양성에서 꺾여버리게 됩니다.

 

구로다 나가마사

 

일이 이렇게 진행되자 왜군은 주변으로의 세력 확장에 주력을 했고,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를 공격하게 됩니다.

 

이 당시 황해도는 함경도, 평안도와 함께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해 민심이 좋지 못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이정암은 과거 연안 도호부, 평산 도호부 등의 부사를 지내며 공평하게 일처리를 하여 민심을 얻었던 목민관이었습니다.

 

분조를 지휘하던 광해군은 황해도 초토사로 이정암을 임명하였고 이에 그는 의병 500명을 모집해 황해도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연안성으로 갑니다.

 

 

연안 부사로 있을 당시 명성이 높았던 이정암이 연안성으로 들어오자 왜군의 주력 부대를 피해 섬에 주둔해 있던 연안부사 김대정의 합류를 시작으로 여러 의병장들이 자신의 의병 부대를 이끌고 합세합니다.

 

그렇게 연안성 입성 4일차에 1400명까지 이정암의 군세가 늘어납니다.

 

신각 장군

 

연안성은 전임 연안 부사였던 신각 장군이 성곽을 보수하고, 우물을 파놓고, 물자를 비축해 놓는 등 수성전을 할 수 있게 준비가 잘 되어있는 상태였습니다.

 

황해도 공격을 담당하게 된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의 곡창 지대인 연백평야를 손에 넣기 위해 연안성을 함락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속 부대 병력 5천을 이끌고 연안성으로 향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4개월 여가 흐른 8 28. 왜군 선봉부대 1000명이 연안성에 당도합니다.

 

왜군이 눈앞에 나타나자 성 안의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성을 버리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사람도 생겼지만 이정암은 "백성들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했으니 죽음이 두려우면 떠나라" 며 항전의 의지를 다잡았습니다.

 

곧이어 왜군이 성을 포위하고 항복하라 사자를 보내왔지만 "너희는 병사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로써 싸운다" 말하며 이정암은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리고 시작된 왜군의 본격적인 공세.

 

왜군은 신식 무기인 조총을 이용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옵니다.

 

연안성의 군사들은 화살을 쏘고, 물을 끓여 성을 기어오르는 병사들에게 퍼부으며 격렬히 저항했습니다.

 

 

9월1일. 구로다가 이끄는 왜군의 본대가 합류하는데요. 이로써 적의 규모는 5천명이나 되었고 그 기세에 연안성의 군사들은 다시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군사들의 동요를 본 이정암은 그들을 독려하기 위해 마른 장작을 잔뜩 쌓은 뒤 그 위에서 다시 전투를 지휘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에게 "성이 함락되면 여기에 불을 질러라. 내가 적에게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을 것이다." 라 말합니다.

 

또한 왜군에 포로로 잡혀갔던 탈출 해 연안성으로 돌아온 역관이  '내일 아침까지만 버티면 적이 철수할 것이다'는 전언을 가져옵니다.

 

이정암의 항전 의지를 보고, 하루만 더 버티면 왜군이 물러난다는 말을 들은 연안성의 군사들은 다시 사기가 올라갔습니다.

 

연안성전투 기록화

 

이날 밤 왜군은 최후의 공격을 감행해오지만 때마침 역풍이 불어 연안성 군사들은 대대적인 화공을 가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결국 아침이 밝아왔고, 왜군은 연안성을 포기하고 퇴각합니다.

 

이에 이정암은 물러나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추격대를 편성해 철수하는 왜군의 후방을 급습해 마소 90여필, 군량미 130여석을 노획하는 전과까지 올리며 연안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이정암이 연안성을 지켜냄으로써 황해도의 곡창지대가 왜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정암

 

혈전을 승리로 장식한 이정암은

 

 

以二十八日圍城 以二日解去(이이십팔일위성, 이이일해거)

28일에 성을 포위했다가 2일에 포위를 풀고 물러갔습니다.

 

 

라는 한줄짜리 장계를 조정에 올립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승리를 거두면 자신의 공을 부각하기 위해 노력했을 테지만,이정암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적을 물리치는 일은 쉽지만 이를 자랑하지 않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이정암을 치하했고 그에게 정2품의 벼슬을 제수하고 황해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합니다.

 

이정암

 

1593년에는 전라도관찰사가 되었고, 1596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 공도 세웁니다.

 

하지만 죄수를 임의로 처벌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다시 황해도관찰사로 기용되어 도순찰사를 겸하였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에는 재차 황해도초토사로서 연안을 수비하였고, 전란이 끝난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합니다.

 

1604년 연안 수비의 공으로 김시민 장군, 이억기 장군 등과 함께 선무 공신 2등에 책록되었습니다.

 

숫적 열세를 극복하고 연안성을 지키고, 나아가 황해도의 곡창지대까지 지켜낸 이정암.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았던 이정암 같은 영웅이 있었기에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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