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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

 

태백산 호랑이 평민 출신 항일 의병장 신돌석

 

신분제가 존재했던 조선. 평민이 의병을 지휘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뛰어난 지도력과 전술로 평민이지만 의병장이었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입니다.

 

신돌석

 

신돌석은 한말 의병투쟁에 있어서 평민 출신의 의병대장으로는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민중적 기반 위에 막강한 의병 세력으로 성장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신돌석의 본관은 평산이며 본명은 태호입니다.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강인한 체력을 갖고 있었으며 용감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시냇가를 단번에 뛰어넘을 만큼 그 용력이 남달랐다고 야사에 전해집니다.

 

1895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신돌석 역시 이때 19세의 젊은 나이로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경상북도 영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또다시 의병항쟁이 발발하였습니다.

 

1906 3 13일 신돌석도 평민의 신분으로 의병 100여 명을 모아 영릉의병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재차 의병운동을 전개합니다.

 

4월에 울진 장흥관에 이르러 일본군의 배 9척을 기습하여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6월에는 원주에서 일본군들을 습격했습니다.

 

이어서 삼척, 강릉, 양양, 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그들이 전선을 가설하는 작업을 공격하여 방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야사에 따르면 일제가 전선을 잇는 작업을 하는 중 단숨에 총을 가진 왜병들을 때려눕힌 뒤 나무 전신주 여러 개를 뽑아서 패대기치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당시 전신주는 일제 침략의 첨병 취급을 받아 의병들의 공격 대상 중 하나였습니다.

 

 

1907년에는 울진에서 다시 의병을 모집한 후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하였습니다.

 

원구에서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피해를 주었습니다.

 

신돌석과 그의 의병들은 산악 지역에서 주로 유격전을 펼치며 지세에 능하지 못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하였습니다.

 

신출귀몰한 그의 작전에 경악한 일본군은 신돌석을 크게 경계했으며 회유책이나 현상금을 걸어서 그를 잡으려 노력했습니다.

 

일본군이 청송에 집결해 있을 때 이를 공격하기 위해 의병을 가까운 청부역으로 진군시킨 신돌석.

 

이러한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의병을 자청하여 3000명이나 군대가 증가하였습니다.

 

 

일본군이 신돌석의 의병 부대가 세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영양의 주곡으로 퇴각하자 이를 공격하여 격퇴시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10여 일간 머물면서 주민들을 안정시켰으며, 이후 진보의 삼위에서 또다시 적을 격파합니다.

 

또한 경주의 대산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영덕의 조현에서 적과 싸워 승리합니다.

 

10월에 영해경무서를 습격하고, 이후 울진의 수동으로 돌아와 군량을 조달하였습니다.

 

 

1907 12월에 의병장 이인영을 중심으로 13도 의병이 연합해 서울을 공격하기로 해 전국의 의병부대가 양주로 모여들었습니다.

 

신돌석 역시 경상도 의병을 대표해 의병 1000여명을 이끌고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13도연합의병의 서울 침공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의병 재편 과정에서 신돌석 부대는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13도연합의병부대의 각도 의병대장은 양반, 유생 출신의 의병대장으로만 편성되었습니다.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 뿐 아니라 홍범도, 김수민 등도 신분을 이유로 참여시키지 않아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전국 의병연합은 계획과 지도력의 미흡으로 서울 공격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해산됩니다.

 

 

1908 1월 신돌석은 경상도 영해로 돌아와 평해의 독곡에서 일본군을 격파합니다.

 

1908 3월에는 안동, 울진, 삼척, 강릉 등지의 의병과 결합하여 의병 세력을 강화하였고, 춘양, 황지, 소봉동, 한곡, 희암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해 승리합니다.

 

10월까지 진지를 이동하면서 의병들을 이끌고 활약한 후 겨울이 와서 날씨가 추워지자 이듬해 봄에 다시 거병하기로 하고 의병들을 귀가시킵니다.

 

이후 신돌석은 부하 김상렬의 집에 머무릅니다.

 

그러나 신돌석은 그곳에서 김상렬, 김상근 형제에 의해 암살당하며 너무나 허무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신돌석

 

야사에는 신돌석의 포상금을 노리고 김상렬 형제가 살해했다는 기록도 있고, 독주를 권해 받아 이에 취한 채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밤중에 암살당했다는 기록, 옛 부하인 김상렬의 간청으로 투숙하다 암살당했다는 기록 등이 다양하게 남아있습니다.

 

여러 야사를 취합해 봤을 때 공통적으로 김상렬 형제에 의해 술에 취해 살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평민으로 의병장이 된 신돌석.

 

그의 부대는 군율이 엄격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민중들의 환영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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