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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옹주

 

사도세자를 지켜줬던 누나 화평옹주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정조 대왕의 아버지이자,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사도세자에게는 어머니 영빈 이씨에게서 태어난 동복 누나가 있었는데요.

 

그녀가 바로 화평옹주입니다.

 

 

화평옹주는 영조의 서녀로 영조가 총애하던 영빈 이씨의 첫째 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영조의 총애 또한 남달랐으며, 화평옹주를 너무나 사랑하는 딸바보였습니다.

 

 

1731년 옹주가 5살 되던 해에 천연두를 앓자 영조는 모든 추국과 형을 정지시켰습니다. 딸이 아프니 부정탈 행동은 금기했던 것인데요. 다행히 옹주는 무사히 완치가 되었고 그해 화평옹주로 책봉이 됩니다.

 

화평옹주는 어질고 성품도 온화했으며, 동생인 사도세자와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영조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혼이 나면 그를 위로해주었으며, 영조에게는 동생 사도세자를 사랑으로 대해달라며 간청을 했을 정도였고, 사랑하는 딸의 말은 잘 들었던 영조였습니다.

 

화평옹주가 12살때 참의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을 부마로 간택해 둘을 혼인시켰습니다.

 

영조는 화평옹주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공주나 옹주가 혼인을 하면 궐 밖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도 어기고 궐에서 사위와 함께 살게 합니다.

 

이때도 영조는 자신의 친모의 자택이었던 이현궁을 화평옹주의 신혼집으로 주기 위해 고칠 정도로 딸 사랑이 지나 칠정도였습니다.

 

'한중록'을 보면 영조의 자식 사랑은 비정상적이었으며, 편애를 하였다고 나와있습니다. 혜경궁 홍씨는 화평옹주를 가리켜부왕의 자애를 특별히 입으시니"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죠.

 

모두 영빈 이씨의 소생이었지만 화평옹주는 영조가 끔찍이 사랑했으며,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는 미워했습니다.

 

영조의 사랑을 받았던 화평옹주는 자신이 그 모든 사랑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동생들과 나누려 했을 만큼 심성도 고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화평옹주는 첫 딸을 낳다가 난산으로 요절하니 그때 그녀의 나이 이제 겨우 22살이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옹주를 사랑했던 영조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영조는 옹주의 부고를 듣자마자 그녀의 빈소로 가 밤새 통곡했습니다. 날씨가 무더워 건강을 상할까 신하들이 염려가 되어 환궁을 권유했지만 듣지 않았다 합니다. 또한 옹주의 염하는 것도 직접 보았으며, 그녀의 장례를 국상에 버금가게 호화스럽게 치렀습니다.

 

 

이때 신하들이 옹주의 장례로는 너무 지나치다 간언 했지만,영조는 듣지 않았고, 간언을 한 신하들을 모조리 파직시켜버렸습니다.

 

영조는 "딸의 경우에는 화평 옹주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이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깊은 슬픔을 나타냈습니다.

 

사도세자

 

화평옹주가 일찍 사망한 사건은 영조에게도 슬픔이었지만, 사도세자에게도 큰 불행이었습니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유일하게 중재할 수 있었던 화평옹주가 사라졌기 때문인데요. 이제 부자의 갈등을 막아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중록'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평옹주 계실 제는 동생 역성을 들어 일에 따라 부왕께 말씀을 올려 맺힌 것을 푼 일이 많았는데, 그 옹주 돌아가신 후에는 위에서 과한 행동을 하시거나 자애가 부족하셔도 "참으시어 그리 마소서" 할 이 없으니, 점점 부왕의 자애는 부족하고 경모궁께서는 두렵기가 날로 심하시니 자식 된 도리를 점점 못 차리시니라. 화평옹주 계셨으면 부자간에 자애와 효도를 갖추게 하였을 것이니, 착하신 옹주 일찍 돌아가신 것이 어찌 국운과 관계치 않으리오. 지금 생각하여도 애석하도다.


 

혜경궁 홍씨의 말처럼 화평옹주가 오래 살았다면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관계가 극한으로 치닫지 않도록 조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화평옹주가 죽고 영조의 총애는 그녀의 동복 막냇동생 화완옹주가 차지합니다.

 

그러나 화완옹주는 언니와 달리 영조의 사랑을 나누려 하지 않고, 홀로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데만 관심이 있었고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 사이를 중재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화평옹주가 사망하고 10년 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할 때 어느 누구 하나 사도세자를 비호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화평옹주가 죽지 않고 이때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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